2014년 불법 ‘회계조작사건’ 딛고 이긴 해고무효소송(2심)…대법, 단 9개월 만에 ‘파기’시켜

[양승태 대법원 사법부의 ‘사법 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촉구가 시민단체와 노동·종교·학계 단체들로 확대되고 있다. 대법원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최고 기관으로서, 최종심판권을 갖고 있어 농단에 따른 충격과 피해도 ‘최상급’이다. 사건에 대해 대법 파기 환송은 물론 상고법원 설립을 위한 ‘판결 흥정’까지 대두됐다. <노동과세계>는 해당 피해 조직의 사례를 재구성하는 당사자의 인터뷰를 통해 ‘사법농단’의 과정을 심층 취재 소개한다.]

김경율 회계사(48)

2013년 9월 쌍용차 해고무효소송 2심이 종착역을 향해 가던 때, 서울대 최종학 교수의 의견서가 나왔다. 쌍용차 회계조작 사건의 마지막 ‘교두보’였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는 최 교수의 의견에 일제히 기대를 걸었다. 그때까지 희생된 쌍용차 조합원 숫자는 24명. 당시 한상균 지부장은 ‘죽지만 말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다니던 때였다. 권영국 변호사와 김경율 회계사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단정 지었다.

권영국 변호사와 함께 쌍용차 해고무효소송 2심에서 회계조작 사건을 파헤치다 만난 김경율 회계사(48). 권 변호사와 함께 김 회계사의 결합은 당대 최고의 조합으로 손색이 없었다. 소송에서 한 번도 져 본적 없는 권 변호사에다, 현대건설, 삼성상용차 등 회계 부문에서는 소송에 져 본적 없는 김 회계사였다. 그에게는 기업의 회계 부문이 ‘해고’라는 노동문제와 연관돼 법적 다툼을 하던 최초의 쟁점 사안이기도 했다.

김 회계사가 쌍용차 사건을 맡게 된 건 2008년 중순. 2009년 초반에 20~30쪽 의견서를 작성했다. 1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의 의견서가 계속 돌았다. 국회 토론 자료에 올라가있었고. 청문회 때도 나왔다. 근데 1심에서 패소했다. 1심에 패소한 후 박주민 변호사한테 연락이 왔다. 민사소송을 해보자는 요청이었다. 해고 문제를 중심에 둔 민사소송이었다. 노조 간부들과 만나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노조 양형근 조직실장이 서류를 끼고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다. A3 크기의 감사조서였다. 100쪽짜리 한 묶음이었다. 감사조서는 검찰조서처럼 정리되기 전에 만들어진 데이터 전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백업 데이터였다. 깜짝 놀랐다. 회계사들끼리 하는 얘기가 있다. 감사조서는 ‘팬티를 벗긴 것’으로 통한다. 그만큼 구하기 어렵고 귀중한 근거자료다. 그 조서는 안진 회계 법인이 작성한 것이었다. 1심 때 구했다고 했다. 비록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소했지만 감사조서를 확보한 건 엄청난 ‘전리품’이었다.

근데 문제는 ‘쐐기문자’와 같았다. 전혀 못 알아보게 출력이 돼있었다. PDF 파일로 받아놨다고 했다. 식별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수천 년 지난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숫자의 형태를 일일이 대조해 하루에 한 시간, 때로는 30분 틈틈이 해독해 나갔다. 어떤 날은 열 시간 이상을 보기도 했다. 숫자의 연관성을 찾아 헤매기를 거듭했다. 두 달째부터 숫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누락된 숫자가 있었음을 알아냈다.

회계는 인과관계가 분명해야 하는 부문이다. 허점을 발견했다. 예컨대 ‘1+2+3+4=5’라고 할 때 ‘4’라는 부분이 통째로 빠져있었던 것이다. 쌍용차의 '적정한' 유형자산을 의도적으로 만들기 위해 5177억을 빼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1심 때 냈던 의견서는 ‘의혹’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사실상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2심 재판에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쌍용차 회계조작 사건이 사회문제화 되면서 2심 재판부는 ‘심도 깊은 논의’를 위해 전문가를 추천했다. 당시 선정된 제 삼자 전문가는 서울대 최종학 교수였다. 삼성과 가까운 인물이라는 평이 많았다. '우리'는 이번 건은 다르다고 봤다.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던 터였다. 우린 절대 질 수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최종학 교수는 안진 회계법인의 손을 들어줬다. 그해 11월 최 교수의 의견서를 놓고 전체 대책회의를 가졌다. 모두 포기 상태였다. 절망 상태였다. 거의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김 회계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 말라’고 했다. 반드시 우리가 이길 거라고 주문을 걸었다. 그는 열흘 동안이나 밤을 새서 4~5장의 최종보고서를 썼다. 그리고 법원에 최 교수를 직접 대면해서 청문회를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김태욱, 장석우 변호사가 가세했다. 두 번의 청문회를 걸쳐 공방이 오갔다. 결국 세 명의 변호사들이 최 교수를 상대로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김 회계사는 “당시 최 교수는 옷을 놔둔 채로 정신없이 도망치듯 법정을 빠져나갔다”고 기억했다. 결국 다음해 2014년 2월 2심 고법에서 승소 결정이 내려졌다.

문제는 또 있었다.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이었다. 안진 회계법인이 2008년에 작성한 ‘감사조서’가 논란이 됐다. 1심에서 통했던 그 감사조서는 2심에서 회계조작 사건의 주요 근거가 됐던 ‘반전’의 자료였다. 심상정 의원의 도움을 받아 금감원 담당자를 불러들였다. 김 회계사는 “당시 금감원 최고참이 왔었는데 벌벌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전했다.

금감원과의 싸움은 사실 간단하지 않았다. 감사조서 뭉치를 보여줬다. 어떻게 안진회계 법인의 자료가 정당했는지를 추궁했다. 이번엔 안진회계 법인의 자료를 본 적이 없다고 둘러댔다. 노조 양 실장이 감사조서 제출 근거로 접수증을 제시했다. 그때서야 받아 봤다고 실토했다. 앞뒤 숫자가 안 맞는 것도 인정했다.

하지만 더 ‘큰 산’이 기다렸다. 사법농단의 전초가 된 ‘제 2의 감사조서’였다. 금감원이 ‘앞뒤가 안 맞다’고 해서 다른 감사조서로 바꾼 문제의 보고서였다. 싸움의 양상이 뒤바뀌게 된 순간이었다. 김 회계사는 “예전 1심에서 노조가 찾아갔을 때 감리를 해줬지만, 안진 회계법인의 손을 들어주는 꼴이 됐다”면서 “노조간부가 몇 번 찾아갔다고 쉽게 응해줄 금감원이 아닌데, 결국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심에서 이긴 후, 대법에는 금감원의 보고서가 제출됐다. 2심에서 이겼을 때 당시 법조계는 대법원 재판까지 가는데 2~3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기에 주변에서는 대체로 ‘이 정권에서는 못할 것이고 질질 끌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불과 9개월 만인 그 해 11월에 2심을 뒤집어버렸다. 충격이었다. 당시 세 곳 사측 변호인들도 ‘중구난방’이었던 때였다. “어떻게 사측 변호인들이 논리적 일관성이 없었는데도, 그런 와중에 결정이 돼버린 건지” 김 회계사는 알 수 없었다.

김경율 회계사(48)

대법 상고에 제출된 금감원의 자료를 요청했다. 금감원은 거부했다. '비밀 유지'가 이유였다. 정보 공개 재판을 걸었다. 1심, 2심에서 모두 이겼다. 하지만 그 끝도 보기 전에 대법원의 파기 환송이 내려져버렸다. 대법 판결이 끝난 후에야 금감원의 의견서를 받게 됐다. 허망했다. 그는 “역시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의견서였다”면서 “금감원을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금감원의 그 보고서는 검찰은 물론 민사소송, 본안소송, 손배소송 등 모든 곳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했다.

김 회계사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2년 전에 학보사에서 학생 한명이 취재 중이었는데 최 교수를 취재했고 (내게도) 취재요청을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면서 “그때 당시 눈물이 났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문서 하나 보기도 힘들었다. 졌으니까.”라고 그는 분노를 삼켰다. 당시 일했던 참여연대 사람들에게도 아쉬움은 컸다. ‘구조조정’에 손을 들어주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감사조서와 (제가 쓴) 보고서에 대해 단 한 줄이라도 안 봤을 것”이라고 한숨을 토했다.

김 회계사는 쌍용차 30번째 희생자 김주중 조합원의 죽음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해고무효소송이어서 2심에서 승소한 것이 그대로 대법에서 판결났다면 그날 복직이 됐을 것이고 이런 불행한 사태는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패소한 1심에서는 전혀 싸우지 못했지만, 승소한 2심 과정에서는 자살자가 없었을 정도로 희망에 차 있었다”고 전했다. 2014년 4월 회사가 대법에 상고하면서 스물다섯 번째, 대법 파기 환송이 되자 12월 스물여섯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가 6월 27일 목숨을 끊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 조합원을 애도하기 위해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렸다. 서른 번째 희생자다. 5년 전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가 있었던 자리다. (사진 변백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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