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철도 ‘합법파업’…“예고된 파업이었지만 예견할 수 없었다”는 황당무계한 대법 논리

[양승태 대법원 사법부의 ‘사법 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촉구가 시민단체와 노동·종교·학계 단체들로 확대되고 있다. 대법원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최고 기관으로서, 최종심판권을 갖고 있어 농단에 따른 충격과 피해도 ‘최상급’이다. 사건에 대해 대법 파기 환송은 물론 상고법원 설립을 위한 ‘판결 흥정’까지 대두되고 있다. <노동과세계>는 해당 피해 조직의 인터뷰를 통해 ‘사법농단’의 과정을 취재 소개한다.]

김기태 철도노조 전 위원장. ⓒ 노동과세계 변백선

2009년 11월 27일 철도파업 이틀째, 철도노조 영주지부 집결지는 ‘대영장례식장’이었다. “파업에서 이기면 장례식장을 걸어 나가지만 실패하면 우리들의 장례를 치르라는 의미”라고 자신감을 내비치던 때였다. 동해지구는 동해역지부가 동해역지구와 태백역지구로 나뉘어 차량, 기관차, 시설, 전기 모두 파업대오를 유지했다. 제천지구 역시 별다른 이상 없이 파업대오가 유지됐다.

당시 전국의 철도파업 조합원들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 배경엔 ‘합법파업’이 있었다. 이날 대검공안부장은 “철도파업은 합법파업”이라고 선언했다. 정운찬 국무총리는 철도파업에 대해 ‘무리한’이라는 표현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빙법파업’(법을 빙자한 파업)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공사 직원 월례조회 때였다. 당시 철도파업을 지휘했던 김기태 노조위원장은 “철도역사에는 ‘빙법파업을 해드려 죄송합니다’라는 사측의 현수막이 걸렸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불법파업’이라고 하지 못했다. 하지만 12월 1일 사태는 돌변했다. ‘불법파업’으로 매도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가 관계 장관회의 워크숍 직후”였다면서 “정부가 파업을 예상했고 비상수송 대책으로 군 인력을 투입하려 할 때 국방부가 ‘합법파업이라 대체인력 투입에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김기태 철도노조 전 위원장. ⓒ 노동과세계 변백선

2011년 3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새로운 판결을 내렸다. 파업에 대한 ‘무분별한’ 업무방해 요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필수공익사업장 파업이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을 때’로 한정했던 것이다. 철도 노동자들에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철도파업은 그동안 늘 ‘업무방해죄’로 탄압을 받았다. ‘불법파업’ 꼬리표 때문이었다. ‘직권중재’라는 낙인이 매번 찍혔다. 무더기 징계와 해고가 반복됐다.

그런데 2014년 대법원은 2009년 철도파업에 대해 업무방해죄를 적용했다. “예고된 파업이었지만 예견할 수 없었다”는 황당무계한 논리였다. 2011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대법원은 법리적 관점이 아닌 ‘국가경제적 관점’에서 허가해 철도 파업을 종식시켰다. 대법원 스스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협조한 재판’이라고 자백한 꼴이다.

김 위원장은 당시 대법원의 논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경고파업을 세 번이나 했고 필수유지 인력을 신고도 했는데, 그래도 (사측이) 예측을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혀를 찼다. 2009년 철도파업은 직권중재가 폐기되고 필수유지업무 제도가 도입(2008년)된 이후 사실상 최초의 파업이었다. “사측이 5114명 정원을 축소하고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해버려 파업에 들어갔지만, KTX열차의 경우 100%가 필수유지인력이라 빼놓고 일반 열차 갖고 파업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김기태 철도노조 전 위원장. ⓒ 노동과세계 변백선

‘사법농단’으로 드러나고서야 김 위원장은 ‘확 이해가 가더라’고 했다. “재판부가 지엽적인 문제만 갖고 계속 물어봤고, 변호사가 재판부에 그렇게 얘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업무방해죄에 대한 직접적인 심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정말 동네 양아치들도 이렇게 하지 않을 텐데 민주국가에서 사법부 사람들이 그런 걸 하고 있었으니, 진짜 제일 먼저 청산해야할 세력들”이라면서 “사법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뭘 기대하겠나. 사회적 약자는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고 성토했다.

2009년 철도파업은 ‘합법파업’임에도 불구하고 초유의 피해를 낳았다. 교섭이 끊기고 파업은 9일 만에 끝났다. 김 위원장은 곧장 구속돼 이듬해 7월에 출소했다. 조합원 13,000명이 징계에 회부되고, 2006년에 민사소송으로 걸려있던 손해배상액 103억 원에 대한 압류가 들어왔다. 조합 기금 통장이 모두 압류 조치됐다. 전국적으로 200명의 노조간부가 해고됐다. 김 위원장은 “사측은 2009년 단체협약 교섭장에 나오지 않았고 ‘이번 기회에 민주노총의 중심인 철도노조를 손보겠다’는 소리가 청와대로부터 들려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풍비박산 난 상황임에도 사측에 대한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것은 오히려 힘이 됐다. 조합원들이 스스로 두 번의 총회를 열었다. 조합비를 인상시키고, 채권발행을 결의했다. 어떤 조합원은 혼자서 2억 원어치 채권을 구입하기도 했다. 민주노총 산하가맹조직들도 채권구입에 동참했다. 103억 원 가압류가 결국 해결됐다. 김 위원장은 “동지로서 함께한다는 의미를 가슴으로 절감했던 때였고 30년 넘게 운동해왔지만 가장 어려웠던 당시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김기태 철도노조 전 위원장. ⓒ 노동과세계 변백선

공공영역에 대한 ‘사법농단’은 국민 모두가 ‘피해자’다. 철도노조 파업이 한창이던 2013년 12월 27일 대전지법은 법인설립등기를 인가하고 국토교통부는 같은 날 밤 9시 기습적으로 면허를 발급했다. 당시 수서발 KTX 운영법인 설립 등기 사건은 SR과 코레일이 분리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철도노조는 ‘고속철도 통합운동’을 벌이고 있다. “수익이 보장된 알짜노선만 운행하는 SR때문에 코레일의 고속철도 수입이 줄어 지역의 철도역과 열차 운행을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사법농단이 없었다면 분할될 필요도 없고 민영화 문제로 국민들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고 좀 더 질 높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서 “이탈리아 제노바 다리 붕괴사건의 경우 가방으로 유명한 루이뷔통 같은 민간회사들이 만든 것인데, 운영주체가 민간회사들이다보니 제대로 보수가 안 돼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쉽진 않겠지만 2009년 사건에 대해 재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사법농단’ 해결에 대한 희망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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