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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

기사승인 2018.09.20  16: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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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 생존자 김지은 씨 기고,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

노동자였던 김지은입니다. 현재는 안희정 성폭력 피해 생존자입니다. 불편하실지 모르지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정부 부처의 계약직 공무원이었습니다. 시작은 10개월 단기간 행정인턴이었습니다. 당시 계약직들은 근무기간이 다 되면 평가를 통해 일부 기간을 재연장하는 식이었습니다. 계약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밖에 모른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학위를 따야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조언에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그렇게 기간제 근로자, 연구직을 거쳐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고 공공기관에서 6년 정도 일했습니다. 금융 채무자이자, 병환의 가족을 부양하는 실질적 가장이었으며, 성과로 평가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였습니다.

 

8월 18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집회 (사진=변백선)

 ​​​​​​노동자 김지은의 모습이지만, 제 또래 많은 친구들이 비슷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선배로부터 세상의 부조리를 또 다른 일로써 해결할 수 있다며 선거 캠프 제안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근무 중인 곳의 계약 기간이 다 되어 월급도, 미래의 보장도 없는 캠프에 들어갔습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매일 새벽 사무실에 출근해서 동료들의 책상을 닦고, 쓰레기통을 비웠고,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캠프 안의 분위기는 기대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모두가 후보 앞에서는 경직되었습니다. 후보의 말에 대들지 말고 심기를 잘 살펴야한다는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수없이 들었습니다. 정치권에 온 이상 한번 눈 밖에 나면 다시는 어느 직장도 쉽게 잡지 못한다는 말도 늘 함께였습니다. 이력서보다 선배들의 추천과 험담이 채용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치권 특유의 ‘평판조회’였습니다. 살아남으려면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선배들의 눈치도 봐야 했습니다.

이후 별정직 공무원으로 도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채용이라서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충남 홍성에 내려갔습니다. 저에게 인수인계를 해주던 전임 비서는 지사를 8년 가까이 모셨지만, 해고 일주일 전에 통보를 받았습니다. 별정직 공무원의 임면 권한은 절대적으로 기관의 장인 도지사에게 있었습니다.

도청에 들어와 가장 힘들었던 건 안희정 지사의 이중성이었습니다. 민주주의자이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와 실제는 달랐습니다. 안희정의 수행비서는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휴일은 거의 대부분 보장 받지 못했습니다. 메시지에 답이 잠깐이라도 늦으면 호된 꾸중을 들어야했고, 24시간 자신의 전화 착신, 아들과의 요트 강습 예약, 개인 기호품 구매, 안희정 부부가 음주했을 때 개인 차량 대리운전 등 일반 노동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주어졌습니다.

가끔 선배들에게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비서는 업무의 범위가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지사가 지시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내야 한다고 교육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수술에도, 친척의 장례에도, 제몸이 아플 때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8월 18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집회 (사진=변백선)

새벽부터 주말까지 이어진 업무에 저를 돌볼 시간은 없었고, 생각할 시간조차도 없었습니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되뇌며 살았습니다. 스스로에게 잔인한 말 ‘괜찮아’ 라는 문장으로 저의 아픔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점차 주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건 내 평판만 깎아 먹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괜찮은 척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지사 험담을 하면 혹여나 일에서 잘릴까 주변에 좋은 이야기들만 했습니다.

그러다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성폭력 피해를 당했고, 다음날 지사가 바로 사과 하는 것을 듣고 잊으려 했습니다. 아니 잊어야만 했습니다. 여러 차례 피해가 이어졌지만 더 주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눈밖에 벗어나지 않도록 더 일에 집중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비참하고 참담했지만, 그게 살 길이었습니다. 지사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일만 했습니다. 노동권 침해와 성폭력 범죄 안에 갇혀 살았습니다.

저는 최초의 여성 수행 비서였기 때문에 이전 선배들이 겪었던 노동권 침해 뿐 아니라 성적 폭력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미투 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올 2월, 안희정 지사는 미투운동을 언급하며 제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범행을 가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계속 안희정의 노예로 밖에 살 수 없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고 싶었습니다. 이후 검찰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졌고, 여러 존재의 압박이 가해진 상황에서 '안희정 무죄'라는 기울어진 판결문을 받아든 채, 지금은 항소심 중에 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업무상 수직적, 권력적 관계로 인하여 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지위·직책·영향력 등 위력이 존재하지만 행사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위력의 존재와 행사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는 일상적 위력은 눈에 보이는 폭행과 협박뿐만이 아닙니다. 침묵과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것, 직장에서 술을 강요당하고, 달갑지 않은 농담을 듣는 것, 회식자리에서의 추행도 노동자들이 겪는 위력의 문제이며, 심하게는 갑질로 나타납니다. 

24시간 업무 중인 수행비서에게 상사의 지위는 24시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것을 고의적으로 성범죄에 이용한 가해자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하지만, 제가 마주한 현실은 이 중요한 판단을 기피하였습니다. 씁쓸하고 괴로웠습니다.

 

8월 18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집회 (사진=변백선)

저는 더 이상 노동자 김지은이 아닙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수입도 벌지 못합니다. 고소 이후로 반년 넘게 재판에만 임하고 있습니다. 재판 중에 노동자로서 성실히 일했던 제 인생은 모두가 가해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좋은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피해자답지 않게 열심히 일을 해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수년간의 제 노력은 일반적인 노동자의 삶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피해자다움과 배치되는 인생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저는 이제 노동자가 아닙니다. 제가 만약 정상적인 노동자로서의 삶을 보장받기를 요구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피해자다운 것이 업무를 외면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사는 것인가요? 하루하루의 업무가 절실했던 제가 당장 관두고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다시 노동자가 되고 싶습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 상사와 함께하고 싶고,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동료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제가 다시 노동자가 되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언젠가 꼭 다시 불리고 싶습니다.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성차별을 겪고 있다는 것. 그동안 피해자들은 피해사실을 밝히지도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올 상반기를 달군 ‘#미투 운동’으로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이자 함께 바꿔야 하는 현실입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온전히 듣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 씨가 공동대책위를 통해 보내온 글을 싣습니다. 민주노총과 연대단체들은 성폭력과 성차별에 맞서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을 응원합니다. 이 글은 민주노총과 연대단체들이 공동 발간하는 추석선전물에 실렸습니다. [편집실]

노동과세계 편집실 kct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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