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조가 2018 전태일노동상에 선정됐다. ⓒ 노동과세계 변백선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의 절규를 외치며 스스로를 불태운 지 48주기가 되는 11월 13일 모란공원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 MTU)이 전태일 노동상을 수상하였다. 이주노조 우다야 라이 위원장은 “일천 이주노조 조합원, 100만 이주노동자를 대신해 전태일 노동상을 받게 되어 뜻깊다. 이주노동자 권리 쟁취를 위해 지금까지 투쟁해 왔듯이 앞으로도 모든 노동자의 단결 투쟁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자!”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2001년에 결성된 최초의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인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시절부터 치면 17년, 2005년 최초의 독자노조인 이주노조 출범부터는 13년이다. 그 동안 이주노동자는 민주노총의 같은 조합원으로서 늘 전체 노동자투쟁에 함께 해왔다. 그 사이 한국사회 이주민은 200만이 넘었고 그 가운데 이주노동자는 100만이 넘었다. 노동인구가 부족하고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는 더욱 필요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일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 48주기를 맞는 오늘, 이주노동자들은 이 나라 경제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으면서 권리마저 최저 수준, 무권리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러한 상태를 깨부수고 더 나은 삶과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끊임없이 써 왔다.

노예연수생을 거부한 이주노동자 투쟁

80년대 후반에 저임금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올림픽 등을 거치며 한국의 경제성장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아무런 정책이나 제도는 없었다. 중소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외국인력 도입을 요구하자 정부는 90년대 초에 산업연수생제도를 만들었다.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연수생 명목으로 맘대로 부려먹다 버리겠다는 정책이었다. 여권과 통장, 신분증을 압류하고 쥐꼬리만한 임금도 지급하지 않고 욕설과 폭행이 다반사였다. 인권유린 상태에서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은 대거 사업장을 이탈해서 미등록노동자가 되었다. 94년에는 산재피해를 당해 팔잘리고 손가락 잘리고 다친 노동자들이 산재보상을 요구하며 경실련 강당에서 농성을 벌여 보상을 받았다. 95년에는 네팔 산업연수생들이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여 전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때리지 말라”, “욕하지 말라”, “여권과 통장 돌려 달라”, “임금을 달라”가 이 시기 주요 요구였다. 노예연수제로 불린 산업연수생제도 시절, 이러한 투쟁과 함께 현장에서는 작업거부 등 파업이 종종 발생하였다.

이주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노동자 계급운동으로 접근한 일군의 활동가들과 이주노동자들은 2000년 결성한 ‘이주노동자 노동권 완전 쟁취와 이주취업의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본부(이노투본)’의 활동을 거쳐 2001년 5월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를 창립했다. 이주지부는 2002년 4월에 천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결집한 집회를 통해 노조 대중투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필자도 이 집회를 통해 그렇게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처음 접했고 연대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을지로 훈련원공원에서 집회를 하고 거리행진을 하여 명동성당 앞에서 정리집회를 할 때, 어느 노동자가 방송차 위에 올라가 처절하게 했던 발언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피도
빨갛고 한국 사람들 피도 빨간데 왜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가!”

단속추방의 광풍에 맞서다

산업연수생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노동법 적용을 받는 노동자로 유입시키는 고용허가제 법이 2003년 8월에 통과되자 정부는 제도를 조기에 안착시켜야 한다며 미등록 노동자에 대한 강제 단속추방이라는 칼날을 서슴없이 휘둘렀다. 이주노동자의 80%에 달하던 미등록 노동자를 인간사냥 하듯이 사업장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잡아갔다. 공장에서 잘리고 거리에서는 단속되니 이주노동자들은 갈 곳도 없었다. 이 때 많은 이들이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이주지부는 이주노동자 공동체들과 함께 100여 명이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들어갔다. ‘강제추방 저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은 11월 15일부터 2004년 11월 28일까지 380일이나 지속되었다. 이주지부 대표와 민주노총 임원이 공동으로 투쟁단장을 맡았다. 이 투쟁이 정책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고용허가제와 단속추방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폭로하고 농성을 통해서 노동운동과 진보진영 전반적으로 연대를 크게 확장하고 이주노동자 활동가 주체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성과를 이어 2005년 4월 24일 당시 영등포 대영빌딩 민주노총 강당에서 100여 명이 모여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단속추방 중단·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 고용허가제·연수제도 분쇄! 노동비자 쟁취!”를 외치며 이주노조가 출범했다.

지난 5월 8일 경기도 여주, 양평에 있는 느타리버섯 농장을 찾은 순회 2주차 투투버스. ⓒ 노동과세계 변백선

모진 탄압 속에서도 노조를 지키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결성한 노조를 정부는 그냥 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조합원과 간부들을 표적단속해서 강제추방 해버렸다. 2002년 9월 2일 평등노조 이주지부 활동가였던 비두, 꼬빌을 잡아갔다. 2004년 2월 농성단 대표였던 샤말 타파를 잡아갔다. 이주노조 출범 직후인 2005년 5월 13일 이주노조 초대 위원장 아느와르 후세인을, 2007년 11월 까지만 위원장, 라주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을, 2008년 5월 2일 토르너 위원장과 소부르 부위원장을 잡아갔다. 2010년 미셸 카투이라 위원장에 대해서는 고용허가제 취업비자를 박탈해버렸다. 미셸 위원장은 미등록체류자가 아니었지만 2011년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들어오려 할 때 입국을 거부당하고 공항에서 추방당했다. 이 모든 단속추방과 탄압은 이들이 이주노조 간부이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미행을 하고 동선을 파악하고 잠복해 있다가 출입국 단속반원들 수십 명이 달려들어 잡아가는 식이었다. 그렇게나 잡아가면서도 ‘표적단속’이라는 비판에 법무부는 늘상 ‘일상적 단속 과정에서 적발된 것’이라는 식으로 발뺌하고 국가인권위 조사나 강제퇴거 집행에 대한 재판이 이뤄지기도 전에 서둘러 추방해버렸다. 이주노조 간부가 되면 추방된다는 야만적인 등식이 성립되던 당시에 조합원들은 탄압에 맞서 싸우면서도, 이렇게 잡혀가는걸 막아내지 못하는 민주노총을 원망도 했다. 이주 간부들의 삶이 뿌리 뽑혀 본국으로 추방당해 다시는 한국에 입국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국 노조로 치면 열사가 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민주노총에서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느냐는 불만 섞인 말들도 있었다. 민주노총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 추방과 탄압이 있을 때마다 이주노조는 농성이며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민주노총의 이주노조를 지켜왔다.

10년 만의 합법화

2005년 출범 직후 이주노조는 설립신고를 했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추방 대상이므로 노조를 만들 수 없다며 노동부는 설립신고를 반려했다. 이에 노조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패소했고 2007년 고등법원에서는 승소했다. 노동부가 대법원에 상고를 했고 대법원은 8년을 질질 끌며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2015년 6월에 마침내 대법원이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을 내렸다. 소송 제기 10년, 대법원 계류 8년 만에 미등록 노동자도 노조를 만들 수 있는 노동자라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이주노조 간부, 조합원들은 대법원에서 얼싸안고 환호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대법원이 내린 판결이지만 10년 동안 이주노조가 숱한 추방과 탄압을 이겨내고 법외노조 상태에서도 이주노동자를 대변하고 조직하고 투쟁해 왔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 조직화, 세력화는 전체 노동운동의 과제

합법화 이후 조직화 활동에 매진하여 이주노조 조합원은 일천 여 명이 되었다. 그리고 민주노총 내에서 금속노조, 건설노조, 공공운수노조, 대구성서공단노조 등 많은 노조와 사업장에 이주노동자 조합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불쌍하고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므로 시혜를 베풀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같은 노동자로서 차별적 제도와 자본에 의해 착취와 억압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노동자의 권리 쟁취를 위해 이주노동자와 연대하고 이주노동자운동을 지지 지원해야 할 것이다.

이주노조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더 많은 이주노동자가 노조활동에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사실 이주노동자는 체류기간이 정해져 있기도 하고, 거의 일요일에만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서 노조에 결합하기 쉽지 않고 어느 정도 활동경험이 쌓일 만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노조운영 자체가 내국인 노조에 비해 어렵다. 그래도 노동운동의 기본이념이 국적과 인종을 넘어 모든 노동자의 단결이라고 할 때 민주노총 내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동등한 노동자 권리의 주체로서 성장시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노조 내 일각에서는 여전히 이주노동자를 일자리를 침해하는 존재로 보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 늘어나는 이주노동자를 배척하는 것은 단결에도 도움되지 않거니와 내국인 노동자의 노동조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본측은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더 일반화하려 할 것이며 기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악화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주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하고 세력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민주노총 노조와 조합원들이 내 옆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지금은 본국으로 돌아가 활동하고 있는 초창기 이주노동자 활동가가 한 얘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인간선언’을 했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노동자선언’을 했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투쟁선언’을 했다. 오늘날 전태일 열사 정신을 이어 받아 국경 없는 연대투쟁으로 모든 노동자가 단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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