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개정 취지에서 후퇴하는 산안법 하위법령

지난해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 씨의 산업재해가 불러온 ‘위험의 외주화’와 노동 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28년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됐다. 그러나 정작 김용균 씨는 개정된 산안법의 대상이 아니다. 발전소, 지하철, 철도, 조선업 등이 산안법의 도급 금지 대상에서 빠진 데 이어 시행령에서 규정한 도급 승인에서도 제외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 4월 입법예고한 산안법 하위법령이 법 취지보다 한참이나 후퇴하면서 정부가 사실상 ‘위험의 외주화’를 용인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故 김용균 추모 조형물 ⓒ 노동과세계 백승호(세종충남본부)

 

지속되는 위험의 외주화

법 시행령은 제정된 법의 구체적이고 정확한 시행을 위해 제정된다. 그러나 산안법의 경우 시행령이 오히려 상위 모법(母法)의 취지를 해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입법예고된 산안법 시행령 51조는 황산, 불산, 질산, 염산의 4개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설비의 보수 해체 작업 등으로 한정한다. 태안화력의 김용균 씨가 담당하던 전기사업 설비의 정비 업무나 구의역에서 사망한 노동자 김 씨가 담당하던 궤도사업의 점검 및 설비보수 작업은 도급 금지는커녕 승인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또한 대표적인 하청 노동자의 산업재해 현장인 조선업 하청도 도급 승인 대상에서 제외됐다. 태안화력이나 구의역 사고 당시, 사고의 주 원인은 ‘위험의 외주화’에 따른 무분별한 도급이라는 점이 지적됐다. 정부도 김용균 씨 사고 당시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하겠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정작 마련된 법안에선 위험의 외주화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시행령은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 위한 원청 책임 강화에도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행령 67조는 건설기계 27개 기종 중 타워크레인과 건설용 리프트, 항타기, 항발기의 4개 기종에서 발생하는 사고에 대해서만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도록 지시한다. 최근 5년간 건설기계장비에 의한 사망자는 2,539 명으로 같은 기간 전체 건설현장 산재 사망자의 절반에 이른다. 시행령이 사고가 다발하는 건설기계에 대해 원청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 백승호 (세종충남본부)

안전에는 차별이 있다 

산안법 시행령이 특수고용노동자를 배제하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산안법 시행령은 특수고용노동자 중 산재보험이 적용되는 9개 직종(학습지교사, 보험설계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택배기사 퀵서비스 기사, 건설기계, 카드모집인, 대출모집인)만을 적용대상으로 규정한다. 화물운송 노동자나 영화-드라마 스탭 등 예술노동자, 운수 노동자 등은 적용대상에서 제외된다. 

현재 특수고용노동자는 25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고 직종만 50개 이상에 달한다. 한정적인 법 적용으로 대다수의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산안법의 보호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또한 시행령 54조는 ‘사무직에 종사하는 근로자만 사용하는 사업장’을 도급 금지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임대업, 전문과학 및 서비스업, 정보 서비스업, 교육 서비스업 등 다양한 업종의 사업장은 시설관리 등의 도급계약을 맺을 때 도급인으로서의 안전조치 책임에서 제외된다. 더구나 ‘사무직’이라는 개념자체가 모호해 이를 악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전진은 더뎌도 후퇴는 빠르게

고용노동부는 지난 19일, “중대재해 발생에 따른 작업중지의 범위·해제절차 및 심의위원회 운영 기준을 전국 지방노동관서에 알렸다”고 밝혔다. 개정된 산안법 시행은 내년 1월이지만 그보다 반년 이상 앞서 지침으로 개정된 법을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노동부의 현행 지침은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전면 작업중지 명령을 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변경된 지침은 중대재해가 발행한 사업장에서 산재가 다시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해당작업 또는 중대재해가 발생한 작업과 동일한 작업"에 한해서만 작업중지 명령을 내리도록 지시한다. 사고 발생시 작업 중지의 범위가 대폭 축소된다. 

반면 작업중지 해제는 더 쉬워진다. 시행령은 사업주가 작업중지명령 해제를 원하면 현장 확인과 의견청취, 심의 판단이 전부 4일 이내에 이뤄지도록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참여는 배제된다.

이 지침이 시행되면 지난 17일, 충남 서산의 한화토탈 공장에서 발생한 유증기 누출 사고에 대해서도 전면 작업 중지가 어려워지고 또한 사업주가 원할 경우 4일만에 작업이 재개될 수 있다. 사고에 개연한 공장 전체의 피해 위험과 인근 주민들에 대한 피해 조사까지 4일만에 마무리 된다. 

 

‘안전 생색내기’ 누더기 법 

민주노총이 20일 오전 산안법 하위법령 수정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가 위험의 외주화를 막고 산업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법령 대신 ‘생색내기’에 골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20일 오전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산안법 하위법령 전면개정으로 위험의 외주화 방지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이상진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하겠다는 대통령과 현 정부의 사회적 약속이 파기되고 있다”면서 “정부가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의 문제에 마땅한 응답을 내놔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기자회견 직후 시행령이 규정하는 도급 승인대상을 대폭 확대할 것, 건설기계에 대한 원청 책임 강화를 27개 기계 전부에 적용할 것, 특수고용노동자의 산안법 적용 직종을 대폭 확대할 것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민주노총은 하위법령 입법 예고가 수정될 때까지 16개 지방노동청에 대한 항의 면담, 집단 의견서 제출, 산재 피해자와의 연대 투쟁 등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21일 산안법 규탄 기자회견을 비롯해 23일에는 건설노동자 기자회견, 24일에는 조선하청 산재사고 기자회견을 예정하고 있다. 25일에는 구의역 참사 3주기 추모 문화제가 진행될 예정이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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