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그날을 재현한 방송트럭

5월17일, 오늘은 공공운수노조 2030 5.18 역사기행 참가 일이다. 어제 마신 술에서 깨지 못하고 반쯤 취한모드로 발걸음을 힘들게 움직여 약속 장소로 갔다.

‘아 오늘 저녁도 오랜만에 본 동지들과 술 한 잔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걸으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숙취가 다시금 밀려왔다. 모임장소에 다다르다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서울교통공사 동지들과 함께 내려가는 버스였나 보다. 오랜만에 봐서 너무 반가운지라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하고 나는 버스에 탑승했다. 10시를 좀 넘어서 출발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후 2시 광주를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휴게소에 한번 들러서 꼬치를 먹은 기억이 있구나’

빛 고을 광주, 내가 기억하는 광주는 5.18의 정신이 깃든 도시, 훌륭한 시민 의식을 보유한 도시로 남아 있다. 노조에 가입한 이후 5월마다 개별적 또는 단체로 광주를 찾아왔었지만, 영남에서 태어난 나에게는 나의 출생지가 광주이었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도시이다. 드디어 광주에 도착하고 나와 함께 버스에 탔었던 동지들과 광주도시철도노조 교육장으로 올라갔다.

올라간 교육장에는 150명을 넘는 각 노동조합의 2030조합원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출석부에 이름을 체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주종이 적혀진 종이와 5.18역사기행 책자를 명찰 뒤에 넣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교육장 내부를 둘러보며 6조의 글자가 붙여진 자리에 앉았다.

나는 소주, 맥주, 폭탄주, 무알콜, 와인 등이 기재되어 있는 종이 중 ‘소주’를 선택하였다.

‘주종을 선택하는 것은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술을 권하지 말라고 선택하라는 건가? 하긴 요즘 술 못 먹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은 꼰대 취급을 받지’ 2030조합원들이 참석했으니 오늘 저녁 화합의 자리에는 주변의 동지들에게 술을 권하지 않으리라 굳은 결심을 하였다.

#각자 서명하면서 선택한 주류 확인 중(진행자 지시에 따라 '무알콜'선택자가 조장이 됨)

하지만 웬걸, 150여명 이상 동지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스텝분이 진행하는데, ‘이제 조장을 뽑을 시간입니다. 들어 오셨을 때, 선택하신 주종 중 ’무알콜‘을 선택하신 분은 일어나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나의 굳은 결심은 빛을 바랬었다. 도대체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었지? 지금 이 순간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여튼 우리 조는 무알콜이 없어서 가장 젊은 조합원분이 조장을 맡게 되었다.

조장이 정해지고 2030조합원들은 518자유공원을 방문 하였다. 자유공원에 도착하니 역사 기행을 출발했을 때의 느낌과 새삼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인가 무거운 느낌, 술이 깨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군복을 입으신 분, 당시 시민군으로서 항쟁에 참여하신 분들이 가이드를 해 주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탄압받았던 모습, 쪼그리고 앉아 양손을 맞잡고 머리에 올린 채 입장하니 무섭다는 생각부터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문의 현장, 또 5.18 이전의 광주사진과 5.18이후 광주시민이 탄압받는 사진을 보았을 때는 심장 한 구석에서 분노인지 모를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군은 국민을 보호하여 함에도 불구하고, 5.18민중항쟁에서 군은 광주시민을 적으로 인식하고 총구를 시민들에게 들이 밀었다. 공수부대 3개여단을 투입되어 총에 착검을 한 채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고 더 나아가 학살하기 하는 모습의 사진을 보니 당시 광주시민이 겪어야 할 상황을 상상되었다. ‘과연 내가 1980년에 광주에 있었으면 이들과 함께 싸울 수 있었을까?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광주시민은 개인의 욕심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랬을 뿐인데~’

5.18자유공원을 나와 금남로로 이동하였다. 금남로에는 전남도청이 있었다.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 그리고 실제로 계엄군이 진행한 학살 작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오월지기 분들이 해설을 해주시는데 내가 속한 6조는 당시 고등학생 2학년으로 5.18민중항쟁에 참여 하신 분께서 맡아 주셨다. 상세한 설명과 함께 잔혹한 현장 그리고 그때의 광주의 모든 이가 함께한 ‘민중자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재판받으려 들어가는 광주시민군 제현과 체험하기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했고 공수여단을 광주에 투입되면서 계엄군의 만행이 심화되었다. 처음 학생들의 집회를 폭력으로 진압하였고 진압에 대한 무력수위가 높아지자 이를 만류하는 광주시민까지도 폭도로 지칭하고 진압 봉을 휘둘렸다. 이에 맞서 시민과 학생들은 싸웠고 점차 이는 시민군으로 변화 되었다. 항쟁기간 내 시민군은 계엄군을 후퇴시킴으로 광주에는 치안의 부재가 생겼지만 이때 광주시민은 진정한 ‘민중자치’를 실현하였다. 서로를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고,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은 너나할 것 없이 헌혈에 동참하였다.

나는 잠시나마 나만의 상상을 해봤다. ‘만약 나에게 총이 있고, 바로 옆이 은행이라면~’

내가 아는 다른 나라의 경우는 대부분 항쟁으로 시작되지만 나중 폭동으로 변질되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광주시민은 달랐다. 비록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고 10일간의 짧은 기간으로 끝이 나지만~ 나는 5.18민중항쟁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공한 투쟁이요, 항쟁이요 더 나아가서는 5.18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는 5.18민중항쟁을 기반으로 지금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더 나아가 촛불혁명을 만들어 낸 힘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 전남도청을 뒤로 하고 금남로를 따라서 5.18기록관을 방문하였다. 5.18 기록관 내에는 많은 자료가 있었다. 그 많은 자료 중에도 기억에 남는 문구를 몇 자 적어본다.

“학생과 여성 여러분은 살아나가서 역사의 증인이 되십시오.”(윤상원님)

“아버님, 누군가가, 우리 모두가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봐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선 성냥이 필요합니다.”(홍기일님)

“나를 마지막 희생으로 기필코 민주사회를 건설해야 한다.”(송광영님)

“한술의 밥이 나에겐 중요하질 않네, 구차한 목숨이 중요하질 않다네, 나에겐 중요한 건 조국이요, 민족이요, 민주요, 민중이라네.”(강상철님)

5.18기록관을 마지막으로 첫날의 일정은 끝이 났다. 그리고 버스에 모두 탑승하고 저녁식사 후 담양에 있는 숙소로 출발하였다. 오전에 광주로 내려오면서 잠을 계속 잤었던 터일까? 아니면 내가 느끼고 고민하는 것이 많은 것일까? 버스에서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후기를 쓰는 지금도, 광주에서 내가 느낀 점과 고민한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정리하여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광주의 시민이 모두 함께 하여,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한 그 바램, 하나로 단결되어 투쟁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나의 일이 아니니까,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라고 생각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를 외면한다거나 ‘노력해도 세상은 변화하지 않으니까’라는 생각으로 모두의 참여가 필요한 자리에 참여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번 518역사기행을 통해서 마음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참여하고 모두와 함께 힘을 뭉쳐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번 518역사기행을 마친다.

내년에도 518역사기행이 진행된다면, 반드시 참여하는 것을 추천한다. 추가로 ‘5번의 함성 1번의 노래 8번의 인사’는 꼭 참여하기를 바란다. 이름이 바뀔지는 모르겠으나, 1박2일로 참여해서 각 사업장의 많은 청년조합원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참여 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청년조합원들의 고민과 그들의 생각을 들어 볼 수 있는 자리가 매년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진행자의 재미있는 운영으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이니 후회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둘째날, 망월동 구묘역과 신묘역을 보고 집회가 있다. 집회는 금남로에서 진행되며, 이후 행진이 있다. 집회 후 행진을 참여하면 꼭 1980년 5월 18일 금남로에서 투쟁하는 광주시민이 된 듯 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재판, 영창 체험하는 곳에는 그 당시 80년 5월 실제 재판을 받은 당사자가 생생하게 그날의 일들을 설명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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