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절차에 들어간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22일 오전 한국정부가 아직 비준하지 않은 4개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에 관한 87호와 98호,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29호 조항의 비준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9월 정기국회까지 비준동의에 필요한 과정을 거쳐 국회에 동의안을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협약 비준에 요구되는 법 개정 및 제도개선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동안 ILO 핵심협약 비준을 반대하는 쪽 논리로 주로 사용되던 법 개정에 정부가 직접 나서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정부 입법안을 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입법 개정안을 준비하면서 “경사노위 공익위원 최종 권고안을 포함해 사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경사노위 공익위원안에 ILO 핵심협약과 충돌하는 조항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영계는 부당노동행위 처벌금지나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등 노동기본권 후퇴 등의 조건을 ILO 핵심협약 비준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어 정부의 노동관계법 개정안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를 낳고 있다. 

 

“협약 비준에 요구되는 법 개정”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입법안을 제출하면 일명 ‘한정애 법’을 비롯해 경사노위 공익위원 안을 기초로 기존에 제출된 노동관계법 개정안은 자연스럽게 폐기 수순을 밟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입법’을 천명한 상황에서 ILO 협약과 배치되는 여당 법안은 생명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정부 입법안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다. 정부가 “협약 비준에 요구되는 법 개정”을 하겠다면서 한정애 법보다 진전된 개정안을 내놓지 않으면 노동계의 반발이 커지는 것은 물론 ILO의 기준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모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23일 오전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부의 입법 개정은 말 그대로 국제 노동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법 개정과 제도 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면서 “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노동기본권을 후퇴시키거나 사용자 민원을 만들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ILO 헌장 19조는 “ILO 협약의 비준이 노동자에게 유리한 조건을 보장하는 법률이나 관습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고 규정한다. ILO 협약 비준을 이유로 노동권을 후퇴시켜선 안된다는 규정이다. 신인수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면서 ILO의 헌장을 위배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핵심협약 비준을 빌미로 노동기본권이 후퇴하는 입법을 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신인수 법률원장은 이어 “법 개정은 ILO가 한국정부에 지속적으로 권고해 왔던 내용과 국제 노동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정부의 입법 개정안에 반드시 포함돼야 할 내용으로 노조법 2조의 근로자-사용자 정의, 공무원노조법 11조, 18조, 교원노조법 8조, 15조의 교원-공무원의 노조 할 권리, 노조법 3조의 파업권과 손배가압류 제도 개선 등을 꼽았다. 

민주노총 기자간담회

 

정부가 할 수 있는 일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밝혔지만 정부에게 실제로 협약 비준의 의지가 있냐는 의심을 비롯해 국회 비준 동의 등 이행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계속 나오고 있어 “정부가 국회 동의 없이 자체적으로 선행할 수 있는 조치들을 우선 수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노총은 23일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정부의 7대 선행 과제를 발표했다. 민주노총이 제시한 정부의 선행과제는 ▲전교조 법외노조통보처분 직권취소 ▲공무원,교원,공공부문 해직자 원직복직 ▲노조설립신고제도 개선 ▲필수유지업무 개선 ▲근로시간면제제도 개선 ▲규약/결의처분 시정명령 개선 ▲단체협약 시정명령 개선의 7가지다. 

민주노총이 제시한 7가지 선행조치들은 모두 시행령, 시행규칙 등이 규정하는 조항들로 국회 동의 없이 정부의 권한으로 시행할 수 있는 조치들이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 할 수 있는 것들을 솔선수범한 후 국회 동의 절차를 밟는 것이 순리”라면서 정부가 선행 조치를 수행함으로 ILO 핵심협약 비준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특히 노동기본권 제한의 대표적 사례중 하나인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을 정부가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은 ILO는 물론 국가인권위원회,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까지 법외노조통보처분 취소를 권고하고 있어 정부의 ILO 핵심협약 비준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명백한 시금석이란 주장이다. 김경자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정부는 사건이 대법원 계류중이라 직권취소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정부의 권한으로 직권취소를 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면서 “정부는 전교조 교사대회가 열리고 전교조가 서른 번째 생일을 맞는 5월 중으로 전교조 법외노조통보를 직권 취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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