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과세계 백승호(세종충남본부)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임원이 저에게 롤모델이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미래에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라… 그때는 롤모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 겸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어떤 점이?’라고 되물으면 말문이 막힐 것 같아서 그냥 솔직하게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릴 적 저는 내 능력을 펼칠 직장과 자녀가 있는 가정을 갖고 싶었습니다. 2015년, 경력을 겨우 1년 채운 신입사원이었던 저는 그런 여성분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롤모델’을 찾으려고 해도 자녀가 있는 여성 상급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 명도 찾지를 못해서 인사팀장님에게 다 어디 갔냐고 물어봤더니 다 퇴사했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아이를 두고 돌아오기 어려워한다나? 남자들은 자녀가 있어도 저녁 회식에 잘만 나오는데 이상하게 여성분들은 ‘아이 때문에’ 한 번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내가 닮고 싶어서 했을 사람들은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롤모델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그저 ‘내가 무럭무럭 자라서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거야’라고 홀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019년 9월, 저는 민주노총 여성활동가대회에서 롤모델 잔치를 했습니다. 남성 중심 운동권에서 성평등도 안착시키느라 고생하시는 상급단체 분들, 편견이 콘텐츠에 담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홍보담당자들, 톨게이트와 파리바게뜨 등 현장에서 투쟁하시는 분들…. ‘여성의 삶’을 주제로 맘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교섭과 투쟁에 직접 참여해서 결과를 끌어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 노동과세계 백승호(세종충남본부)

여성 활동가대회에서 민주노총가를 여자 키로 준비해서 함께 부른 것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노동조합 콘텐츠의 문제점을 짚고 콘텐츠를 직접 만들며, 중년의 한국 남성 외에도 많은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이날, 다른 행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보육교사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있는 분들도 조금은 편하게 참여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 활동가대회에서 여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성 활동가대회를 벗어난 민주노총의 현실은 아직 어둡습니다. 7월 비정규직 총파업 때, 저는 여느 집회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화학섬유식품노조에 온 지 1년도 안 된 저는 그날 처음 여성의 목소리로 광화문을 채우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었습니다. 반주가 여성의 목소리여서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이 엄청 많아서 그랬습니다. 그날 대오의 대부분을 차지한 학교 비정규직과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다수가 여성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집회 발언자는 대부분 남성인 것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존재함에도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 왔다는 게 어떤 건지 몸소 느꼈습니다.

민주노총의 여성조합원 수가 점점 늘어 어느덧 1/3을 넘었다고 합니다. 노동자의 생존권과 더불어 조직문화를 선도하는 민주노총이기 때문에, 민주노총에서만큼은 더 많은 여성 교섭위원, 여성 대의원, 여성 간부, 여성 조합원이 ‘보여야’ 합니다. 이제 민주노총에서 여자 키로 투쟁가를 부르는 건 ‘특별한 경험’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역시 행동해야겠죠. 여성 활동가대회 행사장을 나오며, 저는 앞으로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함께 고민해서 만들어갈 성평등한 미래, 서로의 힘이 되어줄 우리, 멋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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